[박종철][김승훈][최환][황적준][정구영]ㅣ[박종운][한나라당][안상수][신창언][박상옥][박처원][강민창][황정웅][반금곤][이정호][강진규][조한경][홍승상]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0412949










http://www.nocutnews.co.kr/news/4718613
당시 실형을 살았던 경찰관은 한겨레에 "홍승상 씨가 한 것"이라며 "위에 보고하기 위해 보고용으로 쓴 것이다. 이후 상황이 달라졌으면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못한 것이다. 보고가 청와대까지 올라갔으니까. 첫 단추를 잘못 꿴 거다"라고 설명했다.

홍 씨는 사건이 일어난 후 3년이 지난 1990년 1월, 경정으로 승진한다.
 1991년 7월에는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는다.







http://h2.khan.co.kr/201701132357001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1월14일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열사가 불법 체포돼 치안본부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수사관들에게 고문·폭행을 당해 사망한 사건입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했으나 언론·의학·종교계의 끈질긴 노력으로 진상이 밝혀지면서 1987년 6월 시민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박종철 열사는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1986년 4월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된 뒤 같은 해 7월15일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했습니다. 2005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따르면, 박종철은 공장에 위장취업한 뒤 3주간의 공장 활동 기간 동안 공장의 위치나 근로조건 등을 꼼꼼히 기록한 <공장활동 보고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출소 후에도 학생운동을 이어가던 박종철 열사는 1987년 1월13일 자신의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연행됐습니다. 경찰이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 열사를 불법으로 체포한 것이었습니다. 다음날인 14일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인 박종운의 소재를 묻는 질문에 박종철 열사가 계속 답하지 않자 물고문·전기고문이 시작됐고 결국 박종철 열사는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습니다. 영원히 묻힐 것 같던 진실은 우연히 사건의 단서를 접하게 된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짧은 기사 이후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박종철 열사 사망 다음날인 15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박종철 열사 사망에 대해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공식 발표

-이날 박군은 오전 8시10분쯤 서울 관악구 신림9동 하숙집에서 경찰에 연행된 뒤 9시16분쯤 경찰이 제공한 콩나물국과 밥으로 아침식사를 했는데 “어제밤 술을 많이 마셔 밥맛이 없다”며 냉수 몇 컵을 요구해 마셨다는 것이다. 이어 10시 50분쯤부터 수사관의 신문을 받기 시작, 11시20분쯤 수사관이 수배된 박종운군(서울대생)의 소재를 물으면서 책상을 세게 두드리는 순간 의자에 앉은 채 갑자기 “억”하는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는 것이다. 경찰은 곧바로 박군을 용산의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급히 옮겼으니 이날 낮 12시 숨졌다. 경찰은 “박군을 조사할 당시 수사관의 가혹행위는 절대로 없었다”고 전했다-


박종철 열사의 시신 부검은 1월15일 오후 9시5분부터 10시25분까지 한양대병원 영안실에서 서울지검 형사부 안상수 검사의 지휘와 황적준 박사의 집도로 실시됐습니다. 사건 당일 현장을 목격한 중앙대병원 오연상 전문의가 16일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했고, 17일 박종철 열사의 부검을 담당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황적준 박사가 물고문과 전기고문 흔적이 있다는 부검 결과를 발표하면서 진상이 속속 밝혀졌습니다.
언론의 의혹 제기가 이어지자 사건 발생 5일 만인 19일 경찰은 마지못해 물고문 사실을 시인하고 수사경관이던 조한경과 강진규를 구속했습니다.

넉 달 뒤인 1987년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경찰의 은폐·조작을 폭로했습니다.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조작했고, 고문가담 경관이 2명이 아니라 모두 5명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과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시민들의 시위는 끊이지 않습니다.


박종철 열사가 죽음으로 지킨
선배 박종운은 2000년 당시 한나라당에 입당해 경기 부천시 오정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잇달아 낙선했습니다.










http://www.huffingtonpost.kr/2017/03/28/story_n_15671260.html








http://www.hani.co.kr/arti/society/rights/778687.html
30년 전인 1987년 1월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30주기를 맞아, 공직자가 자기 위치에서 원칙을 지키고 양심을 따를 때 사회 발전이 이뤄진다는 교훈을 새겨본다. 30년 전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최환 변호사(오른쪽)와 당시 부검의였던 황적준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왼쪽)가 서울 용산구 갈월동 박종철기념관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경찰은 14일 오전 10시40분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9호실에서
 박종철에게 학교 선배인 박종운(54·전 한나라당 부천·오정 당협위원장)의 소재지를 밝힐 것을 요구하면서 물고문을 시작했다. 박종철의 옷을 모두 벗기고는 손과 발을 수건으로 묶었다. 이어 그의 왼쪽 팔과 어깨는 황정웅, 오른쪽은 반금곤, 다리는 이정호가 각각 잡았다. 박종철이 꼼짝 못하게 된 상황에서 강진규가 그의 머리를 욕조에 수차례 담갔다. 이 상황을 조한경이 현장에서 지휘했다. 물고문 도중 11시쯤 박종철은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숨졌다. 그러나 경찰은 그가 수사받다가 갑자기 졸도해서 사망한 것으로 사건을 꾸미기로 했다. 
축소 조작에는 치안감인 5처장 박처원 등 경찰 고위층도 가담했다. 조작이 성공하려면 시신부터 없애야 했다. 대공 수사관 2명이 밤늦게 검찰에 나타난 것은 이를 위해서였다.


 “누구라고 얘기는 할 수 없지만, 여러 사람한테 회유와 압박을 받았지요. 물론 청와대에서도 전화가 왔고요. 이들은 저한테 법대 출신이 아닌(서울대 정치학과) 놈을 공안부장에 앉힌 것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건데 그렇게 고집부리면 사표는 물론이고 신변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협박까지 했어요. 상관이던 서울지검장(정구영)이 제 편을 들어줘서 큰 힘이 됐지요.”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직접 전화해서 부검을 하지 말라고 했지요?
 “강민창과 전화로 1시간 이상을 다퉜어요. 그는 경찰병원 의사들도 쇼크사라고 하는데 왜 굳이 부검을 하려고 하느냐, 이렇게 하면 경찰이 앞으로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시신을 절대로 안 내주겠다고 말했어요. 그가 무력으로라도 부검을 막겠다고 하길래 저는 시신을 인도하지 않으면 특수공무집행방해 현행범으로 당신을 체포하러 가겠다고 강하게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마지못해 동의하더군요. 하지만 부검을 하더라도 경찰병원에서 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입디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경찰 수사 과정에서 죽었는데 경찰병원에서 경찰 소속 의사들이 부검을 하면 그 결과를 국민들이 믿겠느냐면서 민간병원에서 해야 한다고 설득했지요. 결국 한양대병원에서 하기로 겨우 타협이 됐어요.”


-사실대로 적겠다고 결심한 계기나 동기가 있었습니까?
 “의사로서의 양심이자 직업윤리였던 거 같아요. 학교에서 공부할 때 스승(고려대 문국진 교수)이 늘 그랬지요. 부검 잘못해서 사인을 틀리게 하면 부검의를 그만둬야 한다고 말입니다. 또 언젠가는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명백한 사실을 바꾸는 불명예스런 일을 해서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저보다 최 변호사님께서 처음부터 원칙을 지켜주셨기에 진상이 밝혀질 수 있었죠. 
사람들이 안상수 검사가 박종철 사건을 다 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최 변호사님이 시신 훼손을 막고 부검을 관철하셨기에 그 이후 모든 게 가능했죠.”



황적준의 양심에 가로막힌 경찰은 이번에는 사건 축소에 나섰다. 5명 중 조한경과 강진규 2명이 뒤집어쓰고 끝내는 것으로 조작했다. 18일 오전 박처원 처장은 이들 2명을 만나 “대공요원은 사상전이나 접선공작 중에 총에 맞아 죽기도 한다. 다른 관련자가 더 있다 해도 다른 대공요원을 희생시키지 말고 둘이서 책임지고 가라”고 말했다. 대신 경찰은 이들 2명에게 조기 석방과 남은 가족들을 돌보겠다는 약속을 했다. 박처원은 그 뒤 이들에게 각각 1억원씩 든 예금통장을 건네기도 했다.
실제로 고문을 하고도 범인인 경찰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던 선례도 있었다. 1983년 경찰의 고문 수사로 인해 숨진 한일합섬 김근조 이사 사건 때 경찰은 자체 수사를 통해 경찰관 2명을 구속했지만, 그들은 얼마 안 가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박종철 사건과 관련해서도 경찰은 이미 정권 차원의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자체 수사를 약속받았다. 이를 토대로 2명에게 뒤는 알아서 봐줄 테니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잠깐만 교도소에 들어가 있으라는 주문이었던 셈이다.



처음에는 계획대로 되는 듯했다. 부검을 관철했던 최환을 배제한 검찰 수사팀(서울지검 형사2부 신창언, 안상수, 박상옥)은 경찰이 짜놓은 각본대로만 움직였다. 2명뿐이 아닐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검찰은 새로운 사실은 하나도 밝혀내지 못했다. 심지어 고문 경찰관들을 현장 검증에 부르지도 못한 채 조작된 범인 2명을 구속 4일 만에 급하게 기소하고 마무리했다. 하지만 조작의 진상은 약 4개월 뒤인 5월18일에 드러난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7주년 추도 미사에서 △박종철 사건의 범인은 조작됐으며 △물고문을 행한 진범은 구속된 조한경, 강진규가 아니라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3명이라는 폭발적인 내용을 폭로했다. 이로 인해 재수사가 이뤄져 고문 경찰 3명이 더 구속됐다. 또 조작을 주도한 박처원 치안감과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경찰 간부 3명은 범인도피죄로 구속 수감됐다.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는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그동안 산발적이고 개별적으로 이뤄지던 반정부 시위는 시민단체와 야당이 주축이 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조직적이고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6월10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열린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는 6월항쟁의 출발점이 됐다. 이 6·10 국민대회를 앞두고 각 대학은 학교별로 가두 진출 투쟁을 벌였다. 6월9일 연세대 정문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도 그중 하나였다. 이날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20)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7월5일 사망) 박종철에 이은 이한열의 희생은 결국 6월29일 집권세력의 항복선언을 끌어냈다.
박종철의 죽음을 덮고 조작했던 경찰 총수 강민창은 1987년 교묘하게 처벌을 피했지만, 결국 황적준이 친 ‘정의의 그물’은 빠져나가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유일한 ‘야당지’로서 명성이 높았던 <동아일보>는 박종철 1주기를 맞은 1988년 1월 초 부검의였던 황적준 국과수 과장을 인터뷰했다. 황적준은 기억이 모호한 부분은 자신의 일기장을 들춰가면서 사실대로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기자는 일기장을 복사해달라고 요청했다. 꺼릴 게 없었던 황적준은 사적인 부분을 빼고 복사해줬다. 일기에는 1987년 1월15일 오후 치안본부에 불려갔을 때 강민창 본부장이 “박군의 사체에 외상이 없고, 3~4회 욕조에 담갔으니 익사일 것”이라고 말한 내용 등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또 부검 뒤에는 사인을 쇼크사로 기재하라고 회유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49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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